호오포노포노의 비밀(1) : 용신대운-자신을 정화하여 불균형 해소
호오포노포노의 비밀
저자: 조 비테일, 이하레아카라 휴 렌 / 역자: 황소연 / 판미동 / 2011.11.25.
명리학(命理學)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하고 느낀 점이 생겼다. 책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은 책의 서평 등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생략할까 한다.
책의 말미에 가게 되면 <선택은 한계가 있다>라는 장이 나온다. 이 장을 시작하는 맨 처음에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우리들 각자의 청사진을 알고 있는 신성에게 우리를 옭아맨 모든 생각들과 기억들을 치유해 달라고 간청할 수 있다. - 모르나 날라마쿠 시메오나
여기서 말하는 우리들 각자의 청사진이 바로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주팔자(四柱八字)라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사주팔자라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정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그것이 개개인에게 어떠한 한계를 두고 제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신성은 역학(易學)에서 말하는 무극(無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또한 옭아맨 모든 생각과 기억들 역시 개인의 명식에 구성된 각각의 십성(十星)과 오행(五行), 그리고 여러 가지 형충회합(刑沖會合) 등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때 저는 제 동생 때문에 무척 속이 상했었습니다. 그 애 가정이 파탄 난 데다 생활 보조비를 받으며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에요, 동생은 정체성까지 잃어버릴 정도였지요. 그 애가 불행해지는 것을 보며 정말이지 속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돈에, 책에, 영화에 심지어는 그 영화를 보라고 DVD 플레이어까지 보내 줬죠.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어요. 도무지 변할 생각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 이제는 그 애를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한 여성이 물었다.
“나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동생은 지금 그 애가 의도한 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반복되는 프로그램, 기억에 의한 것입니다. 그 애는 그 그물에 걸린 거예요. 바이러스에 걸린 거죠. 그건 그 애의 잘못이 아니에요. 또한 내가 그걸 느끼고 그 애의 고통을 안다는 건 나 역시 같은 바이러스를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죠. 만일 내가 그걸 비워 낸다면 그건 그 애에게서 역시 떠날 겁니다.”
위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이는 명리학적으로 이해하면 동생은 일간(日干) 중심으로 해석하는 자평학(子平學)에서는 비겁(比劫)으로 놓고 해석하기도 한다. 비겁이 고통에 처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비겁은 글의 내용에 등장하는 그녀의 팔자 안에 있으며 그녀와 공유되고 있는 연결된 십성(十星)이다.
이처럼 일간 입장에서 타 십성을 통제하고 개선하는 노력보다는 일간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욱 명식에게 긍정적이라는 것이라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반복되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사주팔자에서 말하는 개인의 명식에 주워진 고유의 패턴 즉 격(格)이나 특정 문제점들이다. 이는 나와 나의 주변인 십성들의 문제이고 역시 나와 직결되고 연결되며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타 십성을 통제 관리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을 먼저 행하는 것이 자신의 주변에서 문제로 다가오는 십성(十星)에 대한 접근 방식일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주를 해석함에 있어 보편적으로 일간(日干)을 자기 자신이라고 놓고 명식을 풀이하지만 사실 팔자의 모든 것이 다 개인 자신인 것이다. 그렇기에 일간 이외의 모든 십성이 나이며 모든 오행이 다 나인 것이다.
우리는 각자 재능을 갖고 이 세상에 왔다. 그 재능은 금방 드러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까맣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그 재능을 감지하게 된다. 이때 그것을 판단하려고 우리의 마음이 나선다. 마음에서 나쁘다는 판단이 들면 심리치료사를 찾든, 마약 같은 각종 중독성 행동에 의지해서 그것을 처리하든 숨기거나 해결하거나 방치하거나 수용하게 된다. 하지만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는 신성의 꼭두각시이자 우리 인생의 조종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선택은 그 흐름에 따르느냐 마느냐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진정한 결단은 충동에 따라 행동하느냐 아니냐를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혹자는 “자유 거부 의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의 내용 역시 책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각자 재능을 갖고 이 세상에 왔다는 구절 역시 개인이 사주팔자를 부여받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 재능의 시기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명리학에서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용신대운(用神大運) 또는 길운(吉運), 호운(好運) 등으로 칭하는 때일 것이다. 또한 신성의 꼭두각시를 인지하게 되는 것은 무언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개개인의 특정 문제점이나 환경, 성격, 인간관계, 습관 등이며 그것이 사주팔자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그것을 일정 부분 팔자의 명주 자신이 조종자가 되어 그 신성의 꼭두각시놀이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삶에 고정된 부분도 있으며 변동 가능한 부분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고정된 것이 있으면 변동 가능한 것 역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감사합니다.